2026 노벨문학상 앤 카슨 — 그리스 고전의 파편으로 새 형식을 지은 시인, 어디서부터 읽을까
10월 8일 스톡홀름에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, 수상자는 아이슬란드에서 "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"고 합니다. 한림원 사무총장이 기자들에게 전한 말입니다. 2026 노벨문학상은 캐나다 시인 **앤 카슨(Anne Carson, 76)**에게 돌아갔습니다.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던 고전학자가 2,600년 전 시의 파편을 재료 삼아, 시도 소설도 논문도 아닌 책을 써 온 40년에 주는 상입니다.

아이슬란드의 바람을 그린 이미지입니다(실제 사진 아님). 카슨은 2008년부터 해마다 얼마간을 이 섬에서 지냈고, 2022년 시민권을 받았습니다.
10월 8일, 한 문장의 선정 이유
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이유는 한 문장입니다(노벨위원회·경향신문).
"고전 전통과 유희적인 대화를 나누며 현대 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,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품 세계."
숫자로 보면 이렇습니다.
- 역대 123번째 수상자, 여성으로는 19번째
- 캐나다 작가로는 2013년 앨리스 먼로 이후 13년 만
- 상금 1,200만 스웨덴 크로나(약 16억 원). 올해부터 100만 크로나 올랐습니다(노벨재단)
- 시상식은 12월 10일 스톡홀름
이변은 아니었습니다. 발표 전 베팅 업체 배당률에서 카슨은 중국 작가 찬쉐와 함께 10 대 1로 맨 앞줄이었습니다(보도, 위키백과 정리).
정작 본인은 덤덤했습니다. 아이슬란드 공영방송에 "다들 미친 것 같아요"라고 했고, 상이 독자를 늘려 줄 것 같으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. "책 표지에 스티커가 붙겠죠. 스티커는 도움이 돼요"(AP).
낱말의 뿌리에서 시작하는 사람
카슨은 1950년 토론토에서 태어나 토론토대에서 고전학 박사를 받았고, 프린스턴·미시간·맥길대에서 고전학을 가르쳤습니다(세계일보). 첫 책 「에로스, 달콤씁쓸한」(1986)부터가 박사 논문에서 나왔습니다. 고대 그리스 시가 욕망을 어떻게 말했는지 따라가는 책입니다.
그는 모든 작품이 낱말의 어원에서 출발한다고 말해 왔습니다. 노벨위원회 안데르스 올손 위원장은 그 자리를 「문헌학자의 집착과 시인의 열망이 만나는 곳」이라고 불렀습니다.
번역도 같은 태도입니다. 사포의 시를 옮긴 「이프 낫, 윈터」(2002)에서 그는 파피루스가 찢겨 사라진 자리를 메우지 않고 대괄호 [ ]로 남겼습니다. 한 낱말만 남은 조각도 그대로 실었습니다. 한림원은 그의 번역서들을 「그 자체로 독립된 작품」으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.
「빨강의 자서전」 — 괴물 쪽에서 다시 쓴 신화
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과업은 붉은 날개 달린 괴물 게리온을 죽이고 소 떼를 빼앗는 일입니다. 고대 시인 스테시코로스가 이 이야기로 쓴 시는 파편으로만 남았습니다. 카슨은 그 파편을 번역하다가 아예 소설로 다시 썼습니다(위키백과).
1998년에 나온 「빨강의 자서전」에서 게리온은 붉은 몸에 날개를 단 수줍은 소년입니다. 헤라클레스는 그를 화살로 쏘지 않습니다. 사랑하게 만들고 떠납니다. 신화의 죽음이 실연으로 바뀐 자리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.
부제는 「시로 쓴 소설」. 미국에서만 10만 부 가까이 팔렸고(AP), 카슨 스스로 입문작으로 꼽은 책입니다(주간경향).
「녹스」 — 상자에 담긴 묘비명

상자에서 펼쳐지는 아코디언 책을 그린 이미지입니다(실제 「녹스」 사진 아님).
녹스(Nox)는 라틴어로 「밤」입니다. 2000년, 오래 연락이 끊겼던 오빠 마이클이 코펜하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. 카슨은 사진과 편지 조각, 메모를 붙여 책 모양의 묘비명을 만들었고, 2010년 그 복제본이 나왔습니다.
제본된 책이 아닙니다. 길게 이어진 종이 한 장이 아코디언처럼 접혀 상자에 들어 있습니다. 책을 이끄는 것은 로마 시인 카툴루스가 죽은 형제에게 바친 비가입니다. 카슨은 그 라틴어를 한 낱말씩 풀어 갑니다. 번역이 곧 애도가 됩니다.
올손 위원장의 말로는 "문학적인 만큼 조각적인 창작물, 상자 형태의 묘비명"입니다. 한국어판(봄날의책, 윤경희 옮김, 2022)에는 2024년 수상자 한강의 추천사가 실려 있습니다. "밤을 들여다보는 책이 왜 이렇게 눈부신 걸까"(위키트리).
왜 지금, 카슨인가
하나는 형식입니다. 브리스틀대 로라 얀센은 "산문을 시처럼, 시를 산문처럼 썼다"고 요약했습니다. 에세이와 시와 번역이 한 권에 섞인 책이 낯설지 않은 지금, 그 길을 먼저 간 사람에게 상이 간 셈입니다.
또 하나는 속도입니다. 시가 산문보다 쓸모 있을 수 있는 이유를 묻자 카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. "더 빠르니까요. 다들 바쁘잖아요."
한림원의 흐름도 있습니다. 2018년 위원 절반 이상이 바뀐 뒤로 문학상은 여성과 남성이 한 해씩 번갈아 받았습니다(AFP). 2024년 한강, 2025년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, 그리고 올해입니다.
한국어로 읽는 순서
주간경향이 꼽은 국내 번역서는 아홉 권입니다. 처음이라면 이 순서를 권합니다.
- 「빨강의 자서전」(한겨레출판) — 줄거리를 따라 읽을 수 있는 입구
- 「짧은 이야기들」(난다, 황유원 옮김) — 1992년 원서, 제목 그대로 짧은 글 모음
- 「남편의 아름다움」(한겨레출판) — 2001년 여성 최초의 T. S. 엘리엇상 수상작
- 「녹스」(봄날의책) — 읽기보다 펼치는 책
- 「에로스, 달콤씁쓸한」(난다) — 시인 이전의 고전학자
「유리, 아이러니 그리고 신」과 「플레인워터」(이상 난다), 「플로트」, 「레드 닥」도 나와 있습니다.
카슨은 상금을 두고 남편과 "나눠 줄 방법을 생각 중"이라고 했습니다. 발표 날에는 전화를 피해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합창단 노래를 들으러 가겠다고 했습니다. 스톡홀름이 떠들썩하던 날, 올해의 수상자가 가려던 곳은 바람 부는 섬의 숲이었습니다.